수주잔고는 계약 총액이지 그해 매출이 아니다. 한국무역협회가 전한 집계에서 국내 조선업 수주잔고는 5월 말 기준 1372억8500만 달러, 원화로 약 189조원이었다. 같은 조선 3사의 2025년 확정 매출 합계는 53조3667억원이다. 나눠보면 3.5년치 일감이 쌓여 있다는 뜻이고, 뒤집으면 오늘 따낸 계약이 손익계산서에 다 들어오기까지 그만큼 걸린다는 뜻이다.
조선·건설·플랜트처럼 인도까지 수년이 걸리는 수주산업에서 실적을 정하는 것은 "언제 계약했나"가 아니라 "지금까지 원가를 얼마나 투입했나"다. 이 시차를 모른 채 수주 공시만 따라가면 실적은 늘 한 박자 어긋나 보인다. 반대로 진행률의 문법을 알면, 이미 공시된 잔고만으로 앞으로 몇 년간 매출의 하한선을 대략 그려볼 수 있다.

수주잔고 189조, 몇 년치 일감인가
가장 단순한 척도는 잔고를 연매출로 나눈 값이다. 잔고가 연매출의 몇 배인지가 곧 "현재 속도로 소화하면 몇 년"이다. 잔고는 무역협회 집계의 5월 말 원화 환산치, 매출은 해양한국이 정리한 2025년 확정 실적을 썼다. 기준 시점이 다르므로 정밀한 재무비율이 아니라 규모 감각을 잡는 어림값으로 봐야 한다.
| 회사 | 수주잔고(조원) | 2025년 매출(조원) | 잔고÷매출(년) | 2025년 영업이익(조원) |
|---|---|---|---|---|
| HD한국조선해양 | 104 | 29.93 | 3.5 | 3.90 |
| 삼성중공업 | 43 | 10.65 | 4.0 | 0.86 |
| 한화오션 | 42 | 12.78 | 3.3 | 1.17 |
| 3사 합계 | 189 | 53.37 | 3.5 | 5.93 |
세 회사가 3.3~4.0년으로 좁게 모인다는 점이 중요하다. 잔고 규모는 HD한국조선해양이 삼성중공업의 2.4배지만, 소화 속도로 환산하면 오히려 삼성중공업 쪽이 길다. 잔고 절대액이 큰 회사가 곧 "더 오래 버틴다"는 뜻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배수가 1에 가까워지면 이듬해 매출을 채울 일감이 부족하다는 신호이고, 4를 넘어가면 도크가 이미 차서 신규 수주를 선별해 받을 수 있는 국면이라는 신호다.

계약금이 아니라 원가 투입이 매출을 만든다
선박 한 척은 계약과 동시에 매출이 되지 않는다. 인도 시점에 한꺼번에 잡히지도 않는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가 정리한 K-IFRS 제1115호 해설에 따르면, 고객이 통제하는 자산을 만들어 가는 계약은 "기간에 걸쳐 이행하는 수행의무"로 분류되어 진행률만큼 매출을 나눠 인식한다. 국내 조선사가 쓰는 진행률 측정 방식은 투입법 중에서도 발생원가 기준 — 총예정원가 대비 실제 투입한 원가의 비율이다.
계약금액 1000억원, 총예정원가 850억원, 건조 4년인 선박을 가정해 원가 투입 일정만 넣고 계산하면 손익이 어떻게 쪼개지는지 그대로 보인다.
| 연차 | 당해 원가 투입(억원) | 누적 진행률(%) | 당해 인식 매출(억원) | 당해 인식 이익(억원) |
|---|---|---|---|---|
| 1년차 | 85 | 10 | 100 | 15 |
| 2년차 | 212.5 | 35 | 250 | 37.5 |
| 3년차 | 340 | 75 | 400 | 60 |
| 4년차 | 212.5 | 100 | 250 | 37.5 |
계약을 딴 해에 잡히는 매출은 1000억원이 아니라 100억원이다. 이익도 15억원뿐이다. 설계와 자재 발주에 원가가 아직 별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반 이상은 3~4년차에 몰린다. 여기서 자주 헷갈리는 지점이 대금이다. 선수금·중도금·인도대금이 언제 들어오든 그것은 현금흐름의 문제이고, 매출은 위 표처럼 원가 투입 비율로만 갈린다. 영업활동 현금흐름과 영업이익이 따로 노는 분기가 이 산업에서 흔한 이유다.
수주는 미래의 약속이고, 진행률은 현재의 청구서다. 손익계산서가 읽는 것은 언제나 후자다.
지금 실적에 잡히는 건 2~3년 전 수주분
데일리안에 따르면 조선업은 선박을 수주한 뒤 건조·인도까지 통상 2~3년이 걸린다. 그래서 오늘의 이익률은 오늘의 선가가 아니라 2~3년 전 선가가 만든다. 실제로 조선 3사의 2026년 2분기 합산 영업이익 컨센서스는 2조342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약 53% 늘었는데, 여기 반영된 것은 2022~2023년에 계약한 고선가 LNG선과 대형 컨테이너선이다. 증권가에서는 2024년 이후 수주분의 절반가량만 건조에 투입된 상태여서 고선가 효과가 2028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본다.
이 구조는 사상 최대 실적 발표와 주가가 반대로 움직이는 경우를 설명하는 틀이기도 하다. 실적이 좋다는 사실은 이미 2~3년 전 계약에 확정돼 있었고, 시장이 새로 가격에 반영할 정보는 지금 도크에 들어오는 계약의 선가이기 때문이다. 분기 실적을 항목별로 뜯어볼 때도 매출총이익률의 방향과 수주잔고의 평균 단가를 같이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틀이 틀리는 조건
진행률 회계는 분모가 추정치라는 약점을 안고 있다. 총예정원가가 흔들리면 이미 인식한 매출까지 소급해 재계산된다.
- 총예정원가 상향 — 후판 가격이나 인건비가 오르면 분모가 커져 누적 진행률이 내려간다. 매출과 이익이 그 분기에 한꺼번에 깎인다.
- 공사손실충당부채 — 총예정원가가 계약금액을 넘어설 것으로 판단되면, 남은 기간의 손실 전액을 그 시점에 미리 인식한다. 잔고가 두꺼워도 적자가 날 수 있다는 뜻이다.
- 환율 — 선가는 대부분 달러, 원가는 상당 부분 원화다. 환헤지 계약의 만기 구조에 따라 인식 시점의 손익이 달라진다.
- 인도 지연 — 진행률이 원가 기준이라 인도가 밀려도 매출 인식 자체는 이어지지만, 지체상금이 계약금액을 깎으면 소급 조정된다.
무엇을 지켜볼 것인가
- 잔고÷매출 배수의 방향 — 절대액보다 배수가 전 분기 대비 늘었는지 줄었는지. 3 아래로 내려가면 이듬해 매출 공백 구간이 가까워진다.
- 신규 수주 단가 — 척수가 아니라 CGT당 계약금액. 오늘 수주의 선가가 2~3년 뒤 이익률의 상한이다.
- 총예정원가 변경 공시 — 사업보고서 주석의 "추정의 변경"과 미청구공사 잔액 증감.
- 공사손실충당부채 잔액 — 늘고 있다면 잔고 안에 원가를 못 넘기는 계약이 섞여 있다는 신호다.
- 후판 가격 협상 — 분모를 직접 움직이는 단일 변수 중 가장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