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를 매입만 하면 주식 수가 영구히 줄지는 않는다. 회사가 사들인 주식을 금고에 넣어두는 것과 같아서 시장 상황에 따라 언제든 되팔 수 있고, 되파는 순간 멈춰 있던 의결권도 되살아난다. 발행주식수가 실제로 줄어 주당 가치가 구조적으로 올라가는 지점은 그 주식을 '소각'했을 때다.

그래서 기업이 자기주식 취득을 공시했을 때 투자자가 실제로 확인해야 하는 것은 취득 금액보다 소각 여부다. 매입과 소각은 발행주식수, 의결권, 되돌릴 수 있는지에서 완전히 갈린다.

묶인 종이 뭉치와 분쇄기에 들어가는 종이 뭉치를 나란히 담은 사물 클로즈업

자사주 매입과 소각은 어디서 갈리나

자사주 매입은 회사가 자기 주식을 시장에서 사들여 '자기주식'으로 보유하는 것이다. 보유하는 동안 이 주식의 의결권과 배당권은 정지된다. 하지만 회사가 원하면 이 주식을 다시 시장이나 제3자에게 팔 수 있고, 매각하는 순간 의결권이 부활한다. 유리지갑은 이 재매각 가능성 때문에 자사주 매입이 우호 지분을 늘리는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쓰일 여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소각은 보유한 자기주식을 장부에서 영구히 없애는 절차다. 소각된 주식은 다시 유통될 수 없고 발행주식수 자체가 줄어든다. 소각에는 이익잉여금을 재원으로 하는 이익소각과 자본금을 줄이는 감자소각이 있는데, 주주환원용 소각은 대부분 자본금을 건드리지 않고 이익잉여금으로 처리하는 이익소각이다. 공시학개론도 자사주 취득 공시를 볼 때 소각 여부까지 확인해야 실제 주주가치 환원인지 판별할 수 있다고 짚는다.

매입은 되돌릴 수 있는 약속이고, 소각은 되돌릴 수 없는 약속이다. 주당 가치의 구조적 변화는 되돌릴 수 없는 쪽에서만 생긴다.

발행주식수와 EPS는 얼마나 달라지나

순이익 100억 원, 발행주식수 1,000만 주인 회사를 가정하자. 이 회사의 주당순이익(EPS)은 100억 원을 1,000만 주로 나눈 1,000원이다. 여기서 100만 주, 즉 전체의 10%를 매입해 보유하는 경우와 같은 100만 주를 소각하는 경우를 나란히 계산하면 차이가 드러난다.

구분자사주 매입 후 보유자사주 소각
발행주식수1,000만 주 (변화 없음)900만 주
유통주식수900만 주900만 주
자기주식100만 주 (의결권 정지)0 주
EPS (유통주식 기준)1,111원1,111원
되돌릴 수 있나가능 — 재매각 시 유통 1,000만 주·EPS 1,000원으로 복귀, 의결권 부활불가 — 영구 소멸

흥미로운 지점은 매입 직후의 유통주식 기준 EPS가 소각과 똑같이 1,111원으로 오른다는 것이다. 100억 원을 900만 주로 나누면 1,111원인데, 자기주식은 EPS 계산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입 공시만으로도 단기 수급과 지표가 개선된 것처럼 보인다. 차이는 되돌릴 수 있느냐에 있다. 매입한 주식을 회사가 다시 팔면 유통주식수가 1,000만 주로 돌아가고 EPS도 1,000원으로 주저앉는다. 소각은 그 복귀 경로 자체를 없앤다. 실적 시즌마다 나오는 자사주 헤드라인을 EPS와 가이던스를 함께 읽는 틀로 봐야 하는 이유다.

계산기와 연필로 계산하는 손을 담은 디테일 컷

소각 규모가 1%냐 5%냐가 중요한 이유

소각이라고 다 같은 무게를 갖지는 않는다. 유리지갑은 발행주식 대비 소각 규모가 1% 미만이면 EPS 개선 효과가 미미하고, 5% 이상은 되어야 시장이 강한 신호로 받아들인다고 설명한다. 앞의 사례에서 10% 소각은 EPS를 11.1% 끌어올렸지만, 1% 소각이라면 EPS는 1,000원에서 약 1,010원으로 1%가량 오르는 데 그친다. 100억 원을 990만 주로 나누면 1,010원이다.

크기가 다른 나무 블록 두 무더기로 규모 차이를 표현한 사물 컷

규모만큼 중요한 것이 재원과 지속성이다. 한 번의 대규모 소각보다 매년 순이익의 일정 비율을 꾸준히 소각하겠다는 정책이 주당 가치에는 더 확실하게 반영된다. 반대로 소각을 하더라도 그해 순이익이 크게 줄면 EPS는 오히려 내려갈 수 있다. 분모인 주식 수를 줄여도 분자인 순이익이 더 빨리 줄면 소용이 없다. 소각이 곧 주가 상승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 조건이 바로 여기다.

주주환원이라는 같은 목적이라도 배당과 소각은 세금에서 갈린다. 현금 배당은 받는 주주가 그해 바로 배당소득세 15.4%를 원천징수당한다. 반면 소각은 주식 수를 줄여 남은 주식의 주당 가치를 높이는 방식이라 소각 시점에는 주주에게 과세되지 않고, 주주가 실제로 주식을 팔아 차익을 실현할 때로 과세 시점이 미뤄진다. 회사가 같은 재원을 배당으로 나눠 주느냐 소각에 쓰느냐에 따라 주주가 손에 쥐는 세후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배당과 소각을 하나의 총주주환원으로 묶어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무엇을 지켜볼 것인가

자사주 관련 공시를 만났을 때 취득 규모라는 한 줄에 멈추지 않으려면 다음을 순서대로 확인하는 편이 낫다.

  • 소각 여부와 시점 — 취득 후 소각을 명시했는지, 취득만 하고 보유하는지. 소각 결정·완료 공시가 따로 올라오는지 확인한다.
  • 발행주식 대비 소각 비율 — 1% 미만이면 상징적, 5% 이상이면 유의미하다. 절대 금액보다 비율로 본다.
  • 일회성인지 정책인지 — 배당과 소각을 묶은 중기 주주환원 정책의 일부인지, 한 번의 이벤트인지.
  • 순이익 추세 — 같은 소각이라도 순이익이 늘 때와 줄 때의 EPS 방향은 반대다. 배당과 소각을 합친 총주주환원으로 보면 왜곡이 줄어든다.
  • 보유 자사주 처분 이력 — 과거에 매입한 자사주를 되판 전례가 있는지. 재매각 이력은 이번 매입의 성격을 가늠하는 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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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